애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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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백 속 엄마 시신 본 시간은 3초였어요.”1)

 

어느 코로나 유족의 기사 속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연일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는 숫자들이 사람이란 사실을 나는 떠올리지 못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국의 사망자 수는 1,300명에 달한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이 격리된 탓에 가족은 고인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고, 장례식도 하지 못했다. 장례는 고사하고 화장장을 찾느라 전전긍긍했고, 사망 소식을 친척들에게 전하지도 못했으며, 애도도, 위로도 없이 고인을 떠나보냈다. 이렇게 소리 없이 우는 눈물을 외면하고 우리는 벌써 ‘회복’과 ‘일상의 정상화’를 이야기한다. 이 말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예전처럼’을 강요받았던 10년 전 어느 하루를 연상시킨다.

 

나의 아버지는 2011년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갑자기 병을 알게 되고, 많이 아팠고, 순식간에 떠나보냈다. 장례를 마치고, 출가한 다른 형제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갔고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흔적이 남은 일상을 살아야 했다. 죽음과 슬픔을 동일시하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물건들을 단번에 정리하려 하셨지만 난 한 사람의 모든 걸 치워 버리는 게 맘에 걸렸다. 비록 사이좋은 부녀지간은 아니었지만, 몇몇 추억이 있던 아버지의 유품을 간직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아끼시던 양복, 구두, 지갑, 서류 가방, 뭐 이런 것,,, 

당시 어머니는 반대하셨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주인 잃은 물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자연스러운 우리의 일상의 풍경이 되어 아버지를 떠올리는 추억이 되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프지 않기까지 우리에겐 슬퍼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날에는 상례(喪禮)가 사라져 가는 경향이 있다. 가족 중의 누가 세상을 떠난 경우에도 사람들은 장례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둘러 평소의 활동을 다시 시작한다. 소중한 존재가 사라지는 일이 갈수록 덜 심각한 사건이 되어 간다. (...) 비단 사람이 죽었을 때뿐만 아니라, 어떤 직장이나 삶의 터전을 떠날 때처럼 <종결의 사건>이 있을 경우엔 애도는 필요하다 (...) 

애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치 잡초의 뿌리는 제대로 뽑아내지 않은 것처럼 사건의 후유증이 오래 간다.”

-‘애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베르나르 베르베르 2) 

 

 

전염병 사망자 유가족들은 밖으로 사망 사실을 쉬이 밝히지 못한다. 위로와 애도가 생략된 채 주위의 불편한 시선을 감당하며 숨죽이며 오늘을 살고 있다. 한 코로나 유족은 부모의 사인이 알려지자 거래처가 끊기고 가족을 잃은 피해자였음에도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애도의 시간은 위로가 아닌 ’코로나 걸린 사람들‘이란 낙인과 싸우는 시간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유족에게 고인에 대해 원망과 한(恨)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3) 그것은 또 다른 아픔의 씨앗이며 좋았던 고인과의 추억마저 왜곡시킬 수 있다. 

그 어느 때 보다 회복과 건강, ’이겨냄‘을 강조하는 2021년 봄, 새로운 출발을 이야기하기 전에 슬픔과 아픔을 감추고 애쓰는 이들에게 그들이 가족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도록 숨지 않고 함께 기억하는 시간을 주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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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신문_2015. 3.28_ Svenska Dagbladet

 

이번 부산시립 ’이토록 아름다운‘에 제안하는 작품은 ’부고(訃告)‘에 대한 것이다. 2019년 ’올해의 작가상‘에서 발표한 싱글채널 작품인 ’후손들에게‘를 준비하면서 한국 사회가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을 부고 기사를 통해 조사한 바 있다.

신문기사에 올라오는 부고를 보노라면, 고인이 유명해서 업적이 있거나, 유족들이 유명하거나.. 아무튼 ’업적‘과 관련이 있다. 업적이 없다면 가족 이름, 장례식장, 발인 일시 정도라 고인을 향한 유족들의 맘이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마치 장례식 앞 건달처럼 서 있는 꽃들처럼 무미건조하고 길거리 정보지보다 못하다.

이렇듯 부고는 대게 남겨진 가족들이 고인을 애도하는 사람들을 위함이다. 하지만 나처럼 1인가구인 사람의 부고는 누가 남겨줄까? 가족이 없거나 업적이 없는 사람은 누가, 뭐라 남겨야 할 것인가. 평소 한국의 부고 기사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나는 우연히 스웨덴 신문에서 발견한 부고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스웨덴 글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인을 떠나보낸 가족들의 애정이 느껴지는 글씨체와 작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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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는 사람들을 장례식에 초대하기 위한 정보가 아니다.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를 애도하고 남은 가족들이 고인에게 마지막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어쩌면 마음의 표현을 꺼내어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한국 사회가 이런 식의 부고는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와 함께 나는 나의 마지막 말을 부고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어차피 장례식에 올 사람도 없을테니까.)

 

이번 프로젝트는 코로나 사망자의 유가족들에게 고인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을 담아 신문에 뒤늦은 부고 기사로 싣고, 이를 Text 작업으로 제작하여 전시하는 형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전시장 뿐 아니라 반드시 신문기사로 이 메시지를 싣고자 하는 것은 이들의 존재(사망자와 유족)를 한국 사회가 외면하려 하기 때문이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치부하며 서둘러 회복을 말하는 모양새가 나는 매우 불편하다. 부고를 통해 고인에 대한 애도와 유족들에 위로를 전하여 최소한 그들이 숨어서 슬픔을 억누르거나, 낙인을 찍어 비난을 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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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배웅_2021. 5. 7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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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치명률1.2%에 가려진 비극> 3 애도도 못 하고 위로도 못 받는 코로나 유족

2)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pp.2011, 466-467

3) “가족을 잃었는데 죄인 취급”..코로나 유족의 1년, 국민일보, 2021. 1. 18, 이슈&탐사 2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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