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Preface- Jeon, Hye-Sook 2000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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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서문> 
시간과 생명력의 축적- 전혜숙/미술사가
 
1. 시간
 
박혜수의 작품에는 시간이 들어있다. 모든 미술 작품은 그것이 만들어지는데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하겠지만, 박혜수의 작품은 작품 하나하나가 시간의 깊이와 축적을 주장한다. 1년여 동안 계속된 자연의 채집과정, 채집한 나뭇잎과 꽃잎을 말라고 빻거나 우려내 색체를 추출하는 과정, 가루를 밀가루 섞어 입방체 형태로 다시 만드는 과정, 나뭇잎과 꽃잎 가루를 하루에 1mm씩 쌓아 굳혀 지층처럼 만드는 과정.... 또한 이름 모를 나무를 말려 조각조각 내고 그 조각들에 우려낸 꽃잎의 색을 물들이거나 혹은 조각을 태우기도 하고 몇 달동안 땅에 묻어두는 과정.. 등을 사진과 함께 꼼꼼하게 기록한 그녀의 채집 일기장은 그녀가 작업하기 위해 공들였던 시간드르이 집요함과 성실함을 말해준다.
 
박혜수가 채집하고 작업대상으로 삼은 자연은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들과 돌들이다. 그것들은 흔해서 그냥 지나쳐 버릴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에게 기쁨과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자연물들이다. 그녀는 이러한 자연의 변화하는 모습을 특이한 방식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그녀의 작업은 자연의 움직임, 변화,성장, 소멸에 관심을 갖고 자연이 생명력과 에너지를 기록하는 앤디골드워시(Andy Goldworthy)의 작품에 근접해 있지만, 그것을 기록하고 보존하되 색체의 추출을 통한 승화된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박혜수의 작업은 더 장인적이고 철저하다.
 
예를들어 1999년의 <존재의 다른 모습>은 녹색과 붉은 색인 두개의  입방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들의 재료는 같은 단풍나무 잎이다. 즉 여름의 단풍나무 잎과 가을의 단풍나무 잎을 말리고 빻아 그 가루를 풀에 섞어 만든 형태들이다. 그녀는 두 입방체를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게 놓음으로써, 두 물체 간의 시간의 간격을 물리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여름과 겨울의 시간차는 색채의 차이라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암시된다.
 
그녀의 색채 추출과정을 읽으면, 색을 얻기 위해 식물과 광물로 다양한 실험을 했던 중세 화가들의 모습니다.였날 여인들이 치자 열매로 옷감을 샛노랗게 물들였을 광경이 상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박혜수의 색채 추출의 목적은 색채 자채에 있지 않다. 그녀는 자연물을 통해 얻은 색채를 통해 자연 속에서 순환되고 있는 시간성과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보여주는데 목적을 둔다.
 
자연에 있어서 시간은 질서이자 법칙이다. 자연 안에서는 생성과 성장과 소멸리 반복해서 일어난다. 자연은 1년에 한번씩 제 자리로 돌아오는 순환의 시간을 나타내지만, 시간의 흐름 안에서 불가역성(不可逆性)에 의해 지배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혜수의 작품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은 자연의 한 부분을 보존, 기록하려는 솩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진지함이 들어있다. 
 
 
Ⅱ. 생명력
 
박혜수의 자연물들은 그녀의 손에 의해 건조되고 염색되거나 심지어 태우고 그을리는 과정을 거친다. 그녀의 작품은 자연 그대로 제시된 사물이거나'자연에 대한(of nature)' 미술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자연 안에(in nature)' 들어가 작업하는 대지미술가들의 그것에 가깝다.
 
결과물로서의 작품은 대부분 무의미하고 생명력이 없어보이는 미니멀(Minimal)한 형태의 입방체들이 많지만, 처음에 채집할 당시에는 대개 그 시물에 있어서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순간에 택해진 것이었다. 그러한 예로, 시각적으로 뿐 아니라 후각적으로도 자연의 싱그러움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가의 오유수, 산수유, 계수나무, 단풍나무,긴잎 모시풀,양버들 등을 말려 가루로 만든뒤 4M*4M크기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바닥에 뿌린 1999년의 '99綠'은 자연 형태에서 멀어진 가장 추상적인 사각형 형태를 통해 자연의 향기와 생명력을 암시한다는 역설을 지닌 작품이다. 가루 상태의 작품의 재료는 전시를 끝내면 사각형의 형태를 잃는다. 결정된 상태로서의 작품의 형태가 아닌 항상 변화 가능한 성질을 지닌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과정미술의 특징을 나타낸다. 
 
박혜수에게 있어서 흙과 돌은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면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과정을 감수하고, 쇠퇴와 소멸을 포용하고 감싸 안는 모성과 침묵의 생명력을 의미한다. 그녀는 건조된 나무 조각을 몇 달동안 땅에 묻어둔 적이 있었다. 이것은 나무 조각들에 꽃잎을 물들이거나 태양광선으로 그을리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깊이와 축적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 방식에서 땅의 동화작용을 경험한다. 오래 두면 땅속에서 썩고 흙이 되어 버릴 것이라는... 또한 그녀는 발견된 오브제(object trouv)로서의 돌을 파내 실내로 들여오기도 한다. 이른 바 위치 이동을 겪은 돌은 원래의 '집'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곳에 존재하게 되지만, 이 돌이 기록하고 있는 땅의 역사와 자연 속에서의 역할은 그 돌들의 주변에서 추출된 식물의 색채들과 함꼐 어우러지면서 전시장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의미를 갖게된다.
 
 
Ⅲ. 가능성
 

박혜수는 이제 첫 개인전을 통해 작가로서의 진정한 삶을 시작하려 한다. 젊은 나이의 작가가 자연과 시간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작업을 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열정과 작업에 대한 성실한 태도가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제까지의 작업을 토대로 하되, 좀더 넒은 안복을 갖고 자연안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진한 가능성을 끌어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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